빈 들판에 전함을 끌어 오던 날은 오늘이 아니야.
내가 한번도 뚫고 들어가지 못한 들판을 그 무게 만으로 헤쳐 들어가 굳건히 서 있는 전함 주위를 서성여.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도 하고, 바람과 숨박꼭질을 하고, 헛되이 슬쩍 밀어 보기도 하고, 두리번 이 배를 띄울 물을 찾아 고개를 돌려 보기도 하는 오늘이야.
그래 나는 들판을 강으로 만들어 배 위에 가볍게 올라 타보기로해. 배는 강물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해. 움직임.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, 저편에서 이편으로 움직이는 배. 나아가 지구의 움직임과 함께 한바퀴 돌고, 태양의 움직임과 함께 더 길게 한바퀴 돌고, 은하의 움직임과 함께 더욱 크고 길게 한바퀴 돌고, 우주의 움직임 속에선 부풀어 오를 움직임. 나는 가만히 배 위에서 한가로이 강물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냥 지쳐가.
빈 들판에 전함을 끌어 오던 날은 오늘이 아니지만, 그 들판에 물을 채워 배를 띄운 날은 오늘이야.
됐어. 무슨 전함이며 물을. 번거로운것 같아. 필요 없어. 다시 빈 들판이 좋겠어. 그러나 강물은 조용히 어디론가 흘러가고, 그 물결에 거대한 전함은 온전히 몸을 기대고, 그 위에서 저홀로 지친 내 변덕 따위는 다시 들판을 불러오지 못하는 오늘이야. 그 속에서 나는 갑자기 정처 없어.
물결이 이르는 곳으로 다다를 때까지 인내를 가져볼까? 그러면 그곳에 네가 있을까? 물이 가는 곳을 거부하고 배를 움직여 볼까? 그러면 네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까? 전함의 포문을 열고 분노를 표출해 볼까? 그러면 네가 조금은 두려워 할까? 레이더를 켜 주위를 살펴 볼까? 이 레이더는 너를 찾을 눈을 가지고 있을까? 물결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공기 위로도 떠오를 수 있게 강한 엔진을 달아볼까? 그러면 이 모든 것들 위로 날아올라 너를 내려다 볼수 있을까?
하는데,
내가 골몰하고 있는 빈 들판 위로 후두둑 봄비가 내려. 무심한 빗방울은 들풀들이 자리를 내어준 마른 흙 위에 끄적인 내 낙서들 위로 떨어져. 물음표를 지우고, 정처 없음을 지우고, 움직임을 지우고, 오늘을 지우고, 전함을 지우고, 빈 들판도 지워.
물기를 머금은 들풀들이 생기로 반짝이기 시작해.
나는 툭툭 손을 털고 일어나.
나는 무엇도 지울 수 없는 더욱 견고한 필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 하는 오늘이야.
- 2012/03/29 04:30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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